단어라는 작은 우주
- 5월 19일
- 3분 분량
단어는 외우는 아니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 영어 단어가 1,000개 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외국인을 만났을 때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그 중 100개도 되지 않습니다. 시험에서는 맞혔던 단어가, 실제 대화의 순간에는 좀처럼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게으름이나 부족함이 아닙니다. 외워진 단어와 경험된 단어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 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십 년의 인지신경과학과 발달심리학은 이 차이를 점점 더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견들이 모이면 하나의 명제로 수렴합니다. "단어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어가 뇌에서 살아 있는 방식
오랫동안 우리는 단어를 추상적 기호 라고 가정해 왔습니다. apple 이라는 글자가 사과 라는 개념을 가리키는 임의의 부호이고, 뇌의 어딘가에 사전처럼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신경과학은 이 가정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독일의 인지신경과학자 프리데만 풀버뮬러(Friedemann Pulvermüller)는 fMRI 뇌 영상 연구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kick(차다) 이라는 단어를 읽기만 해도 뇌의 다리 운동 영역이 활성화되고, lick(핥다) 을 읽으면 혀 운동 영역이, pick(집다) 을 읽으면 손가락 운동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단어를 읽는 일이 곧 그 단어가 가리키는 신체 동작의 시뮬레이션 을 일으키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어가 추상적 기호로만 저장된 것이 아님 을 보여 줍니다. 단어는 그 단어가 가리키는 경험의 흔적 과 신경학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그 단어를 처리할 때마다 그 경험의 흔적이 함께 활성화됩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로렌스 바살루(Lawrence Barsalou)는 이를 근거된 인지(grounded cognition) 라 부르며, 인간의 모든 개념이 본질적으로 감각-운동 경험의 시뮬레이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발견의 의미는 단순합니다. 단어는 본래 경험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 없이 외워진 단어는, 뇌가 살아 있는 단어 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떻게 단어를 익히는가
이 사실은 아이의 자연스러운 어휘 발달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발달심리학자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는 영유아의 단어 습득이 정의 학습 이 아니라 공동 주의(joint attention) 안에서의 사용 경험 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이는 공 이라는 단어를 공 이라고 정의받지 않습니다. 어른이 공을 가리키고, 함께 공을 굴리고, 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험의 누적 안에서 그 단어를 익힙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린다 스미스(Linda Smith)와 첸 위(Chen Yu)의 연구는 이 과정을 더 정밀하게 추적합니다. 아이는 한 번의 가르침으로 단어를 익히지 않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같은 단어가 같은 대상과 반복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통계적 규칙성을 감지하며, 그 안에서 단어의 의미를 추출 합니다. 이 과정을 상황 간 통계적 학습(cross-situational statistical learning) 이라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가 단어를 익히는 방식은 단어 카드를 외우는 방식 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이는 단어를 여러 맥락에서, 여러 감각으로, 여러 사람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반복적으로 경험 합니다. 그렇게 경험된 단어만이 아이의 어휘로 자리 잡습니다.
외워진 단어가 사라지는 이유
이 두 흐름의 연구를 모으면, 왜 외워진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가 에 대한 답이 드러납니다.
외워진 단어는 뇌에서 고립된 정보 로 저장됩니다. 단어의 소리와 그 한국어 번역만이 연결될 뿐, 그 단어와 함께 활성화될 감각의 흔적 도, 동작의 기억 도, 상황의 맥락 도, 함께한 사람의 얼굴 도 없습니다. 뇌는 고립된 정보를 잘 보존하지 않습니다. 사용되지 않고, 다른 정보와 연결되지 않은 기억은 빠르게 가지치기됩니다. 우리가 외운 단어를 잊는다 고 느낄 때, 사실 뇌는 살아 있지 않은 정보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고 있는 것 입니다.
반대로 경험된 단어는 뇌에서 연결된 정보망의 일부 로 자리 잡습니다. 그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활성화되는 감각, 동작, 상황, 감정, 관계가 있습니다. 이 연결망이 풍부할수록 단어는 더 견고하게 유지되고, 더 빠르게 인출되며, 더 풍부하게 활용됩니다. 이것이 유아기 어휘 교육이 단어 카드가 아니라 경험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 입니다.
어휘 교육이 다시 묻는 질문
이 발견들이 어휘 교육에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단어를 가르쳤는가 를 묻기 전에, 그 단어가 아이의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빠르게 외웠는가 를 측정하기 전에, 얼마나 깊이 경험했는가 를 살펴야 합니다.
좋은 어휘 교육은 단어의 수 를 늘리는 일이 아닙니다. 좋은 어휘 교육은 단어의 경험의 두께 를 빚어내는 일입니다. 같은 단어를 노래로 듣고, 그림으로 보고, 동작으로 표현하고, 친구와의 놀이 속에서 다시 사용하고, 그림책의 장면 안에서 다시 만나는 일 — 이런 반복된 경험의 결 이 단어를 살아 있는 어휘로 만듭니다.
참고 연구
Barsalou, L. W. (1999). Perceptual Symbol System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22(4), 577–660.
Barsalou, L. W. (2008). Grounded Cognition. Annual Review of Psychology, 59, 617–645.
Hauk, O., Johnsrude, I., & Pulvermüller, F. (2004). Somatotopic Representation of Action Words in Human Motor and Premotor Cortex. Neuron, 41(2), 301–307.
Pulvermüller, F. (2005). Brain Mechanisms Linking Language and Action. Nature Reviews Neuroscience, 6(7), 576–582.
Smith, L., & Yu, C. (2008). Infants Rapidly Learn Word-Referent Mappings via Cross-Situational Statistics. Cognition, 106(3), 1558–1568.
Tomasello, M. (2003). Constructing a Language: A Usage-Based Theory of Language Acquisi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